이정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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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인과 작업에 대한 간단한 소개 부탁드립니다.
예중을 거쳐 예고를 다니며 다양한 미술 분야를 접하고 익혔다. 예고에서 동양화를 처음 배웠고 한지와 수간색채에 매료되어 동양화를 전공하게 되었다. 현대의 시대를 사는 나의 작품은 이미지와 색채의 조합에서는 극히 현대적이나 한지와 수간채색이라는 재료와 전통 채색화의 기법은 그대로 고수하고 있다.
      나의 작업은 기억 속 혹은 잊혀진 추억 모두를 남겨놓으려는 의식의 기록이다. 공간 속에는 시간차를 두고 그곳에 머물렀던 나 혹은 타인의 추억들이 남아있다. 그곳에 머물렀던 사람들은 서로를 알지 못하지만, 그 공간은 모두의 추억을 기억하고 간직하고 있다. 마치 수백 년을 산 나무가 우리의 역사를 다 봐 온 것처럼. 그렇게 나는 공간을 주체로 나에게 의미 있는 공간들이 공유하고 있는 이야기를 하고 있다.
      한국과 홍콩, 일본, 대만, 싱가포르, 중국 등에서 개인전, 그룹전을 하고 아트 페어에 참가하는 등 작가로 활동하며 대학에서 강의하였다. 10년전 결혼으로 삶의 터전이 한국에서 미국으로 바뀌었고 처음 몇 년은 익숙하지 않은 곳에서 적응이 쉽지 않아 한동안 작업을 이어가지 못했었다. 이제는 이곳에서도 새로운 추억들이 생겨나 다시 추억을 이야기하기 시작하였다.

평소 어떤 방식으로 작업하시나요?
어디든 털썩 주저앉아 생각에 잠기고 대화하기를 좋아하는 나는 의자라는 매개체를 통해 이야기를 시작하게 되었다. 내가 앉았던 그 의자는 비어있을 때라도 그곳에 남겨진 나의 추억이 그 빈 공간을 가득 채우고 있다고 생각한다. 그 추억을 간직하고 또 남기고 싶다는 생각에 결국 단순히 그림으로 그리는 것이 아닌 흔적으로 남길 수 있는 방법을 모색하게 되었다. 많은 시행착오 끝에 실 한 가닥을 가지고 종이에 흔적을 남기는 방법으로 추억을 표현하기 시작하였다. 그래서 나의 작업은 흔적을 남기는 행위로부터 시작이 된다. 한 가닥 선의 흔적이 하나의 추억이 되고 그 흔적이 모여 의자, 집 등 내가 머물렀던 그 공간, 내 이야기의 매개체가 된다. 그리고 그 후 점차 매개체의 형태가 생략되고 오로지 그 흔적을 모아 추억의 응집체를 형성, 표현하게 되었다.

코로나 발생 이후 작업하면서 가장 어려움을 느끼는 부분은 무엇인가요?
올해 4월 캐나다 아트 페어, 6월 한국 개인전이 기획되어 있었지만 아쉽게도 캐나다 전시는 무기한 연기, 한국에서의 개인전도 내년으로 미뤄졌다. 열심히 작업하던 중에 결정되는 전시 연기는 기운이 빠지는 일이다. 이곳 미국의 미술관과 갤러리들은 그동안 모두 문을 닫았었지만 10월 이후로 점차 제한적으로 개방하고 있다. 하지만 여전히 온라인 전시가 주를 이룬다. 며칠 전 온라인 전시를 하게 된 San Francisco의 갤러리에서 작품을 절대 보내지 말고 이미지와 자료만 온라인으로 보내라고 했다. 나의 작품은 이차원의 사진만으로는 절대 그 색감과 마띠에르(matière)를 정확하게 볼 수 없다. 작품 자체가 이미지를 최대한 간략하게 표현하며, 풍부하게 중첩된 재료와 기법의 레이어로 느껴지는 공간감을 온라인 화면상으로 보여주는 데 한계가 많아 아쉬움이 크다.

그러한 부분을 어떻게 대처해나가고 계시나요?
초기 작품에 이미지가 있었다고 하면 최근 점차 이미지 형태가 사라지고 비구상이 되었다. 하지만 요즘 다시 이미지적인 요소를 추가해 보려고 한다. 또한 사진 뿐 아닌 작업하는 과정을 포함한 영상 자료를 포트폴리오 혹은 온라인 전시에 활용할 수 있을지 고민이 많은 요즘이다.

온라인으로 진행되는 여러 행사나 디지털 플랫폼 전시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시나요?
나는 현재 미국 실리콘 밸리에 살고 있다. 최첨단 테크 산업이 가장 먼저 발표되고 발전하는 변화를 실감할 수 있는 곳이다. 언택트 생활방식은 이제 평범한 일상이 되고 있다. 마침 이곳에서 온라인 전시 중인데 아교 반수를 한지에 회를 거듭하며 바르고 말리기를 반복하는 동안의 시간, 분채를 아교에 개어 색을 만들고 한지에 수십 번을 칠하며 올리는 시간, 실 하나를 가지고 수 천 번의 흔적을 남기는 시간을 온라인에서 클릭 몇 번과 스크롤로 넘겨지는 것이 안타깝다. 물론 나부터도 함께 전시하는 다른 작가의 작품들을 쉽게 넘겨버리게 된다. 눈을 확 사로잡는 이미지가 아니면 쉽게 도태되어버리고 지나쳐버리는 것이 사실이다. 그러다 보니 더 작가들은 파격적이고 자극적인 작품을 만들게 된다고 생각한다. 나는 어릴 적부터 <아르놀피니 부부의 초상>이라는 작품을 좋아했는데, 여러 책에서 또는 인터넷에서 쉽게 볼 수 있는 작품이다. 런던 내셔널갤러리에 소장 되어 있는 그 작품을 직접 만났던 순간 그 자리를 떠날 수 없었다. 몇 시간을 작품 앞에서 서성이며 작가가 여기저기 숨겨 놓은, 하고 싶었던 이야기들을 찾으며 한참을 대화 하듯이 보았다. 그리고 그 다음날 견딜 수 없어 다시 갤러리를 방문하였다. 아주 얇은 세필로 배경의 구석까지 세밀하게 표현한 것까지 한참을 세심하게 보며 작가 스스로 얼마나 즐겁게 작품을 그리고 있었을지 나 또한 느낄 수 있었다. 이러한 감동은 책이나 모니터 화면을 통해서는 느낄 수 없는 귀한 경험이라 할 수 있다. 사진은 똑같은 이미지를 전달할 수 있지만 작품이 가지고 있는 감성을 전달하기엔 역부족이라고 생각 한다.

      *얀 반 에이크(Jan Van Eyck), <아르놀피니 부부의 초상>, 1390, 패널에 유채, 82.2x60cm, 런던 네셔널 갤러리 소장


평소 본인의 작업을 어떻게 아카이빙하고 계시나요?

한국에서는 전문가에게 사진을 부탁했었다. 하지만 미국에서는 전문가에게 의뢰하려면 한국과는 비교도 안될 정도로 많은 비용과 시간을 투자해야 한다. 그래서 작품이 완성되면 직접 사진 촬영을 하고 또 홈페이지나 SNS에 포스팅을 하기도 한다. 전에는 작가가 작품만 만들면 되었지만, 이제는 여러 가지 매체를 통해 프레젠테이션 하는 것도 꼭 해야 하는 시대가 되었다. 그림을 그리는 것과 달리 글을 쓰고 정리하며 매체에 올리고 저장하는 것들은 테크놀로지를 따라잡기 버거운 작가에게는 쉽지 않은 일이다. 그리고 나의 작품은 흔적을 남길 때 잔잔한 마띠에르(matière)가 생기는데 이는 전문가들도 사진으로 구현하기가 힘들다. 또 보색 대비가 되는 작품도 많은데 모니터 상에서는 항상 색이 다르게 나온다. 이것이 나의 가장 큰 고민이다. 실제의 색을 모니터에 그대로 표현할 수 있는 기술이 있었으면 좋겠다.

최근 흥미를 느끼는 것은 무엇인가요?

팬데믹으로 인한 Quarantine이 시작되기 전 Halfmoon bay의 바닷가 앞 카페에 갔었다. 오래된 카페의 창틀에 누군가 어떤 연유로 올려놓았는지 모를 돌멩이가 하나 있었다. 어디에 있다가 그곳까지 왔는지 아무도 모르지만 돌이 나에게 자신의 이야기를 늘어놓고 싶어한다고 느꼈다. 코로나가 끝나면 다시 그 돌을 만나러 가야지 하고 있었는데 그 카페는 팬데믹으로 인한 락다운(Lock Down)을 이겨내지 못하고 폐업을 했다. 코로나로 인해 삶이 많이 바뀌었다. 세상이 변해버리는 느낌이다. 또 익숙해지겠지만, 아니 사람들은 벌써 많이 익숙해진 듯 보이지만, 나는 예전의 삶으로 돌아가기를 간절히 바란다. 예전에는 당연하고 자연스러웠던 것들, 같이 웃고 손뼉을 치고, 함께 한자리에 앉아있던 그 모든 것들에 예전에 미처 몰랐던 감사함과 간절함이 커진다.

향후 계획에 대해 알려주세요.

새로운 작품을 시작했다. 내가 하는 작업은 공간에 남아 있는 추억에 대한 이야기이다. 테크놀로지 시대의 지명, 혹은 장소를 찾아가는 새로운 방식에 따라 작품 제목을 나의 추억이 생성된 그 장소의 구글 코드로 정했다. 작품 제목인 그 코드를 입력하면 누구나 작품 속 공간인 그곳을 온라인으로 방문할 수 있다. 그 공간이 시간에 따라 사라질 수도 있고 달라져 있을 수도 있겠지만 공간의 물리적인 위치를 공유하면서 관객과 함께 이야기하려고 한다.


이정은, , 2020, 장지에 수간채색, 91 x 91 cm

1    이정은, <Accumulation of Memories>, 2020, 장지에 수간채색, 91 x 91 cm. 탈락되지 않은 실은 순간 생성되어 흔적으로 변하는 과정을 이야기한다. Quarantine이 시작되면서 집이라는 공간에 몇 달 동안 머무르며 나와 나의 가족이 같은 공간에 추억을 쌓아 가고 있다.

이정은, 작업노트

2    이정은, 작업노트
기억은 점점 희미해지기도 하고 사라지기도 한다. 다시 꺼내어 기억하려고 하여도 결국 완전히 사라져 버려 흔적조차 남지 않기도 한다. 기록하지 않은 것들은 사라지기 마련이다. 그것은 죽음과도 연관 되어있다.


이정은, , 2020, 장지에 수간채색, 61 x 61 cm

3    이정은, <Accumulation of Memories>, 2020, 장지에 수간채색, 61 x 61 cm

이정은, , 2020, 종이에 수간채색, 22 x 30 cm

이정은, , 2020, 종이에 수간채색, 22 x 30 cm

4, 5    이정은, <RH49+PM San Francisco (One’s Last Outing)>, 2020, 종이에 수간채색, 22 x 30 cm